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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사사기 그리스도 중심 읽기 개론 영상
사사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던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 가운데서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2명의 사사(judges)들은 하나같이 온전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기드온과 삼손 조차도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며 심각한 죄를 범합니다.
불순종- 반역- 하나님의 진노- 심판- 부르짖음- 구원- 다시 불순종의 패턴이 점점 강도를 더하며 순환되는 구조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에 가면 말 그대로 막장입니다. 갈 데까지 간 겁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신정 국가였던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사사기 이후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조를 거쳐 다윗왕조를 이루게 하신 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사사기를 읽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스릴 진정한 왕을 대망하게 합니다. 그 왕은 일차적으로 다윗 왕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성경입니다.

아래 구절이 사사기 전체를 조망하는 요약 구절입니다.

사사기 2:18–22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삿 1-2

사사기 전체의 인트로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정복하지 못하고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과 함께 살게 된 내용입니다. 세상과 함께 섞여 그들에게 동화되어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진노를 받게 되어 고통당하는 이유입니다.

삿 2

2장은 사사기 전체를 미리 내다보는 장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들의 반역을 미리 확정적으로 말하며 그들이 받게 될 결과를 말합니다. 여기서 독ㅏ들은 사사기는 비극으로 끝날 것을 예감하 읽게 됩니다 (1-5_
여호수아와 그 세대 사람들도 다 죽고 난 후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라고 진술합니다 (10). 이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반역, 우상숭배라는 배교의 근원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신앙이 전수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의 대상에 대한 내용이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언제나 그들의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구약 성경은 계속 증거합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 단지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슴과 발이 함께 알아야 합니다. 전인격적 앎입니다. 우리도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를 힘써 압시자!
18절: 사사기의 ‘사사’ 는 judge 입니다. 재판관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그 역할은 왕이 있기 전 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원수의 압제 가운데 있는 국민들을 싸워서 구원하는 자이며, 또 그렇게 구원한 백성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만 백성들이 순종했듯이, 사사들이 죽으면 더 심각한 타락에 빠져 하나님을 반역합니다. 그문제는 사사가 죽는다는 것이고, 사사 자신들도 죄에 빠져 이스라엘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독자와 당시 이스라엘의 경건한 백성들은 죽지 않는 사사 (중보자이며 구원자)를 기다리게 됩니다. 죄 짓지 않는 사사, 죽지 않는 사사를 말입니다. 우리는 그 기다리던 사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압니다. 그분은 죄없으시며 영원히 왕위에 계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십니다.
20-23: 이스라엘 가운데 이방 족속을 쫓아내주시지 않고 남겨 두신 이유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께 순종하며 섬기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3:1-6절 부분 참고). 영적으로 보면, 신자의 삶에 남겨 두신 이방인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성, 육신의 정욕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롬 7) 내 속에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면서 탄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신의 소욕과 싸우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을 주님 부르실때까지 살아갑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것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지입니다.
여호수아에서 12지파의 가나안땅 분배 지역과 사사들의 활동지역을 지도들을 참고해서 그려 보았습니다.

삿 3

3장에는 첫 번째 사사 옷니엘과 둘째 에훗과 셋째 삼갈 사사의 구원 스토리입니다.
3:7절부터가 사사기의 본론에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 부분이 사사기 전체를 뒤덮어 버립니다.
불순종- 반역- 하나님의 진노- 심판- 부르짖음- 구원- 다시 불순종의 사사기 패턴이 옷니엘과 에훗의 구원 사건에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사사 에훗 스토리는 청소년 시청 불과 영화입니다 (R19+). 마치 코미디 누와르 장르의 드라마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칼과 창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못 박혀 죽으심으로 원수를 이기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삿 4

네 번째 사사인 여사사 드보라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특징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무찌른 사람의 두 핵심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바락’ 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회를 주지만 바락은 드보라를 의지합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릴 남성의 리더십이 부재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주장하는 교단이나 신학자들이나 목사같은 사람들은 드보라가 여사사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여성 안수’ 를 정당화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여자가 교회 공동체에서 감독이나 목사가 될 수 있는 리더십이 가능하느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 시대 당시의 타락상과 남성들의 리더십 부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여사사를 통한 구원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당시 남성들을 부끄럽게 하고 분발하게 하며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 가족은 그 후손들까지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우호적이고 돕는 민족이 된 것은 모세와 장인 호밥(이드로)의 관계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를 잊고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기셨다 (Hand over)” 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셨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대적들의 손에 “넘겨주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당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사사기의 구원의 패턴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에서 완성되어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사사와 구속자가 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스림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참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삿 5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노래이기보단 여호와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주시며 그 땅에 사십 년 간 평온을 주셨습니다 (31).
주의 원수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한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장군 시스라이지만, 궁극적으로 이 원수는 사탄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우리를 멸하는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역사하는 마귀입니다. 주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린 십자가의 구속의 사역으로 우리는 언제나 이 노래를 부르며 주님 오실 날까지 이미 승리한 싸움을 날마다 싸워 나갑니다.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고” 의 기도가 간절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적은 세상, 사탄과 죽음입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이며, 이스라엘의 어머니인 여 사사입니다. 12명의 사사중 유일하게 여사사입니다. 드보라만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합한 경건한 사사였습니다. 나머지 사사들은 결점과 죄악과 배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참된 지도자가 없는 시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대조입니다.

삿 6

6-8장은 그 유명한 다섯 번째 사사 기드온의 스토리입니다. 주일학교때나 많은 설교에서 용사와 영웅으로 인이 박힌 인물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 이 기드온이 얼마나 부적합한 리더인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악을 범했는지 면면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드온이 잘났거나 사사가 될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이스라엘을 개혁하기 위해 기드온을 통해 그들의 우상 숭배의 대상인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리라고 명하셨고 기드온이 실행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개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과 같은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채울 때, 우리 마음이 다시 주의 다스림 가운데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밤에 몰레 자기 아버지에게 있던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를 찍고 새 제단 위에 둘째 수소를 드렸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노발대발해 기드온을 죽이려고 난리가 납니다. 이는 적반하장도 보통이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있는 우상을 타파한 자를 도리어 죽이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중세 때 종교 개혁을 한 자들을 죽였던 로마 카톨릭의 행태도 이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예배를 개혁하며, 예배 안의 성상 숭배를 파괴했고, 미사를 폐지하고 모든 미신적인 것들을 파괴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실제로 많은 종교 개혁의 반열에 동참했던 성도들이 고문당하고 도망하며 유리 방황하고, 목숨까지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유사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정통 교회 안에 복음의 진리와 신학이 사라져가면서 이단이 정통이 되구요, 정통이 변방으로 밀려 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이 회복한 진리를 외치고 개혁을 하려는 자를 핍박하고 소외시킵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는가 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진리를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습니다.
기드온이 요구한 표징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우리 눈에 기이하고 상상할 수 없는 초자연적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양털만 젖고 나머지는 마르며,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나머지 땅은 젖게 하는 초월적 기적은 하나님이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존재에 대하여 (6:11-24)

본문의 내용에서 추정해 보면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것 같지만, 또 천사와 같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의 지상에 나타나신 것으로 봅니다. 분명한 건 여호와의 사자가 일반적인 사람이나 천사가 아니라, 기드온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나타남을 여호와의 나타나심으로 보았고, 그를 본 것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죽지 않은 것을 두고 “여호와 살롬” (평강) 이라 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대면할 수 없습니다. 보는 즉시 죽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는 경우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실 때 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 받은 자에게 진정한 평강인 살롬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누구 누구에게 임하시니..

웃니엘과 기드온은 구원 사역으로 부름받아 사역할 때 “여호와의 영이 임함” 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구원자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기름붓듯 받으시고 성령충만하여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들을 통해 놀라운 복음 사역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통해 교회가 창조되었습니다. 이 성령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며 교회의 몸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삿 7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완전히 정복하는 전쟁사입니다. 이 전쟁의 특징은 이스라엘이 한 건 없다는 겁니다. 나중에 이겨놓고 자기들에게 능력이 있어 그런 것처럼 자만할까봐 하나님께서 애시당초 그런 씨를 잘라버리십니다. 겨우 3백명의 군사를 추려내셔서,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12) 미디안 적군과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칼과 창이 아닌 나팔과 빈 항아리와 그 안에 든 횃불을 가지고 “여호와라 기드온의 칼이라” 고 외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자기들끼리 죽이게 해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기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건 그들의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사가 되셔서 원수와 싸우시고 승리하신 전쟁임을 그들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과 교만을 원천차단하시기 위해 우리의 것을 내려 놓게 하십니다. 살면서 무언가 성취하고 잘 되면 다 내가가 잘해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된 것이라 우쭐합니다. 잘 안되는 게 있으면 남탓, 하나님 탓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주께 달려 있습니다. 결과가 나의 기준에 부합하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늘 언제나 믿음의 순종입니다.
11절: 기드온은 두려워했기에 여호와의 말씀대로 부하 부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저자가 계속 보여주는 것은 기드온의 두려움이며, 그는 이전에도 많이 주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우신 것입이다.
15절: 꿈을 지으시고, 꿈을 해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반복해서 표징 (증거)를 보아야 믿고 행동하는 유약한 기드온을 봅니다. 그는 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가? 오직 말씀 오직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사사기에 계속 반복되지만,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과 죄와 사망이라는 원수와의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 가운데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을 정복하고 승리하셔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할렐루야!

삿 8

기드온의 승전사인데, 미디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적하거나 환대하지 않은 민족들 역시 함께 멸망당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갔을 때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한 마을 사람들과 집의 사람들에게 신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며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한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보낸 제자들과 그 복음의 메시지의 수용 여부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기드온 역시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사사였음을 보여주는 그의 어처구니 없는 악행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뒤에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하며 잔혹한 학살극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패물을 모아 금으로 에봇을 만든 일 (26-27), 아내를 많이 둔 일 (30) 이 그렇습니다.
8장 33절에서 사사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다시 바알신을 섬기며 구원의 하나님 망각합니다. 이럴때 구제불능이라고 하죠.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 주지 않으시면 모든 인간의 본성이 이렇다는 걸 잘 압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삶이 어려울땐 그렇게 하나님만 찾고 매달리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 삶이 평탄하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갑니까?
24절: 완패한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종 하갈에게서 나은 첫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던 것은 육신의 자녀가 약속의 자녀를 괴롭히는 구속사의 그림이었죠. 이삭과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원수가 된 미디안이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삿 9

아비멜렉이 잔혹한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그가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지를 보여주는 잔혹사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 중 열 손가락에 들어가는 잔학사입니다. 이미 비극은 기드온이 뿌렸죠. 아내를 많이 둔 죄악으로 인해 70명의 아들이 있고 그중에 세겜에 둔 첩에게서 난 아비멜렉이란 인간이 만들어 졌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왕이 되려 (사사) 칠십 명의 기드온 (여룹바알)의 아들 형제들을 바위에서 학살을 합니다. 나중에는 망대에 갇힌 세겜 사람 천명을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최후 역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두개 골이 깨어지고, 자기 부하의 칼에 스스로 죽습니다.
이스라엘의 배교, 악인을 들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악한 자는 자신의 악에 대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된 인간이 벌이는 세상은 이처럼 폭력, 살인, 거짓, 혼돈과 전쟁으로 점철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지금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모든 악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해 보응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억울하게 악한자들에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 런 공의의 나라가 속히 도래하기를 고대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삿 10:1- 11:11

사사 돌라, 야일과 입다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10:6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섬긴 신은 당시 주변 이방 신 모두를 섬겼습니다. 온갖 잡신을 다 섬긴 거죠. 그들의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만 빼고. 바알들,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과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 셌 사람들의 신들입니다. 정말 화가 날 정도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다 진멸시키셔도 그들은 아무 할 말 없습니다. 11-14절에서 여호와는 이번만큼은 절대 그들이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어도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 버려두지 않으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입다를 세워서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 백성으로 자녀로 그의 거하시는 처소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수 많은 우상들을 마음에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악을 행하게 되고 ‘안식’을 상실하게 됩니다.
11장 1-11절까지는 사사 입다의 본격적인 구원활동에 앞서 입다에 대한 일종의 프로필에 대한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는 길르앗의 기생의 아들이어서 구박받았고 쫓겨 났지만, 이스라엘이 그의 용맹함을 보고 그들의 지도자로 다시 부릅니다.

삿 11:12- 40

10:6~12:7절까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사사 입다에 대해 기록합니다. 탁월한 사사였지만, 여지없이 인간 중보자의 한계인 연약함과 죄악을 드러낸 사사였습니다. 성경 가운데 인간의 죄가 펼쳐낸 가슴 아픈 비극중 하나입니다.
기드온도 그랬지만 (6:34) 입다 역시 그가 구원사역을 하기 시작할 때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합니다 (11:29).
구약에 여호와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하는 말씀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을 받은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의 모든 왕, 제사장, 선지자, 여기서는 사사 (왕)의 직분과 사역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분에게서 완성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기름붓듯 성령을 받고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 사역을 하시는 것에서 그림이 완성됩니다.
입다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걸 지키는 과정에서 자기 딸을 잃습니다. 생각할 부분이 참 많은 부분입니다.
입다의 죄는 승리를 얻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고 (29절), 자기 딸이 설마 나오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는 것과 인신 제사를 드리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충돌하는 명령 가운데 서원을 갚기 위해 인신 제사를 택한 죄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딸을 바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는 하나님께서 입다를 용서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수치를 면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딸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왜 드리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셨는지가 의문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선 입다의 악을 허용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더 큰 악을 짓지 않을 수도 있는데… 끝끝내 그는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고 가증히 여기는 인신 제사를 하나님께 서원대로 갚습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신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 으로 잘여기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성품과 명예와 영광에 손상을 가하는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에 침묵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사사는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 조차도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서 택함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연약한 죄악 덩어리입니다. 읽는 내내 자기 백성을 구해낼 완전한 사사, 완전한 통치자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이죠.
승리를 조건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한 입다의 범죄로 죽게 된 입다의 딸의 반응과 말이 더 큰 슬픔을 자아냅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와 순종의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얼마든지 아버지를 원망하며 하나님께 원통하다고 항변할만도 한데 아버지를 통해 원수 암몬에게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경건한 자의 신앙의 전형입니다. 요셉의 신앙, 다윗의 신앙에서도 이런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입다의 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입다의 딸의 신앙의 태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전적으로 순종하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침묵으로 다 받으셨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됩니다.

삿 12

12:1-7절 부분은 에브라임 족속과 입다의 길르앗 사람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동존 상잔의 비극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에브라임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질투는 가장 가까운 한 사람도 죽이지만, 동족을 죽이고 국가를 망하게도 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도 죽이게 됩니다.

삿 13-16

삼손은 열두 번째 사사로 사사기 마지막 사사로 등장합니다. 12 사사들 중 가장 강하고 홀로 이스라엘 원수 블레셋 전체를 대적했습니다. 반면 사사들 중 가장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고, 죄악을 많이 저질렀던 영웅입니다.
가장 많은 분량인 4장에 걸쳐서 삼손의 삶과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삼손을 들어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삿 13

삼손의 출생에 대한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보았던 요한과 예수님의 출생 예고와 유사한 패턴입니다.
불임의 여인이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수태 고지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날때부터 죽을 때까지 구별된 나실인, 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사가 태어났습니다. 이건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 구주 예수가 나신 일과 동일 패턴이네요.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일하심의 방식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 교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메시아 (삼손, 예수 그리스도) 를 자기 백성 가운데로 (이스라엘, 세상) 보내셔서 구원하십니다 (힘으로, 십자가로).
15-25절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기묘자라는 이름을 가졌고, 불꽃 가운데 하늘로 올라간 영광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상에 나타나심’ 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문맥상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여호와가 보내신 사자 (messanger) 로 보는게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삿 14

삼손의 강한 능력과 함께 삼손의 온갖 죄악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방 여자를 보고 유혹되어 결국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적국의 여자입니다.
부모가 아내를 구해주는 전통을 깨가 자기가 부모에게 요구해서 얻어내는 부모 공경에서도 먼 자였습니다. 삼손의 부모 역시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나실인의 모든 규정을 깨버립니다. 시체를 가까이해 만졌고, 포도주(술)을 결혼 잔치때 마셨을 것이고, 나중에 자신의 머리에 삭도가 대어져 깍입니다 (16:19)
교만하여 자기의 강함을 자랑하기 위해 수수께끼를 내어서 비극의 불씨를 만듭니다 (13:12)
그리고 화가 나서 자기 아내를 버립니다 (19-20)
삼손은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사로서의 자격 박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을 그에게 임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자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중보자의 능력, 선함, 혹은 악에 좌지 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려는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삿 15

15장에서 삼손은 자기가 버리고 떠난 아내를 다시 찾아가지만 이미 다른 남자에게 준 걸 알고 개인적인 복수를 합니다. 이로 인해 자기 아내와 장인이 불타 죽고, 수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습니다.
개인적인 삼손의 복수는 정당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삼손을 들어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블레셋과 그들의 악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로 인해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블레셋에서 20년간을 평화로이 지냅니다.
지금까지 삼손의 출생과 그의 행위들을 볼 때,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원수의 압제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자기를 반역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나님
심판하시기도 하시지만 자기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시는 하나님
인간 구원자의 연약함, 죄악과 자격 없음에도 그런 자를 사용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영으로 인간 구원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주권적 구원을 알게 됩니다.
인간 중보자 삼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적 인물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완전한 메시아를 대망했고, 우리는 오신 메시아와 함께 살며, 오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소유된 존재라는 것이 참 감격스러운 아침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삿 16

삼손의 죄악이 절정으로 치닫고, 그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으심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수치를 당하다가 최후를 맞이하는 내용입니다.
16장에서 또 다시 삼손의 범죄로 시작됩니다. 이젠 이방 여자뿐만 아니라 기생(창녀)을 사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17)이 분명했고, 이스라엘의 사사 (통치자) 였음에도 이런 부끄러운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선을 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는 기생에 의해 은 천백 개에 팔린 것(5)과 마찬가지인 삼손은 머리를 깍이고 여호와가 그를 떠나시고 무력하게 되어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며 그들의 연회장에서의 놀이개감이 되는 모욕, 조롱,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에 대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사로서의 그의 수치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수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와 이름과 존재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과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회복시키십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 일은 다시 재현됩니다.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께 끝끝내 불순종하다가 바벨론 왕에게 잡혀 눈이 뽑히고 옥에 갇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기 백성을 이방인들의 손에 넘기셔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은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회복은 온전하지 않았죠.
삼손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받았으나 온전하지 못했고,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이방인에게 넘겨져 조롱과 수치 당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원수들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과 장면들이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로마에 넘겨져 온갖 조롱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단지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가 구원하실 자들의 죄를 대신해 그 모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삿 17

사사기의 본론이 끝나고 결말로 치닫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타락이 극도의 내리막에 도달합니다. 17장 6절에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기준이 없는 시대와 사회가 되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즉명하게 보여 줍니다. 율법이 사라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우상숭배하듯 섬김니다.
17장에서 베들레헴에 거주하는 레위인이 그곳을 떠나 살 궁리를 하는 건 유다지파에 제사가 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더군다나 미가라는 자가 이 레위인과 하는 거래는 나중에 단지파 사람들과도 거래하지만, 성직 매매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죠.
신상을 만들고 제사장을 임의로 사서 복을 받으려는 기복신앙의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마치 집에 부적을 두어 복을 받으려는 시도입니다 (13).
지금 시대의 교회와 기독교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신학이 사라진 시대는 사사 시대의 타락한 이스라엘이 재현될 수 밖에 없음입니다.

삿 18

단지파가 미가의 집의 신상과 레위 제사장을 탈취해 가서 우상을 섬기듯 하나님을 섬기는 확대된 타락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기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걸 기뻐하며 제안을 수락하고 갈아타는 이 레위인은 완전 종교를 생계수단으로 비지니스로 여기는 영적 간음을 행하는 완악한 자입니다. 이보다 더 타락할 수 있을까 싶지만, 사사기 19장부터 마지막 21장까지는 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는 이스라엘의 실상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스라엘에겐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하고 타락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삿 19-21

또 한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계속해서 레위인의 만행이 나오는 걸 보면, 당시 이스라엘에 종교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저자는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에 들어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토록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수 있는지…
영화 시청 등급을 매긴다면 19세 이상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폭력과 성과 잔인함이 수위를 뛰어 넘습니다.
간음을 한 자신의 첩의 장인의 집에서 며칠 유흥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숙했던 한 노인의 집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시대가 재연된 듯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23). 기브아 성읍 불량배들은 나그네의 첩을 성폭행해서 죽이고, 레위인은 그 시신을 12토막 내서 이스라엘 지파에 보내는 (19:29) 악의 악을 거듭합니다.
20장에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같은 이스라엘 지파간에 전쟁이 일어나서 베냐민 지파 하나가 사라질 정도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전개됩니다. 자기 민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훗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을 때 다시 재연됩니다.
21장에서 다 죽이고 4백명 남은 베냐민 남자들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는 과정에서 또 악이 자행됩니다.
사사기의 맨 마지막절인 21:25절은 사사기 시대 전체를 한 문장으로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말씀이 없는 시대, 기준이 없는 시대는 이토록 잔인하고 음란하며 파괴적인 사회와 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정말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평과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릴 구원자, 메시아이신 왕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사사시대에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신실한 남은 자들은 그 어둠속에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