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 읽기 창세기 1 영상입니다. 10분짜리 영상이지만 창세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읽어가야 할지에 대한 좋은 안내의 역할을 해 줄겁니다.
창세기 그리스도 중심 읽기- 창세기 1
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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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세계의 시작(창세기 1장) 과 인류의 시작(창 2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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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이처럼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인 것은 그분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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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그런면에서 내가 누구인가? 우리는 또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을 주고 오늘의 삶의 의미를 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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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1장 26-27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에서 감동이 있었습니다. 26절의 "우리의 형상" 이란 하나님이 복수입니다. 여기서도 창 1:1절에서 처럼 삼위 일체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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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전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였나에 다시금 놀라게 됩니다. 비록 타락으로 깨어진 형상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게 남겨두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 2
하나님의 안식과 안식일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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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창조 후 일곱째 날 하나님이 안식하셨습니다.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이란 완성을 의미합니다. 창조의 완전함 때문에 멈추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십계명에 근거를 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를 둔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이 그래서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안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에덴동산(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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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부분을 시간 순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에덴동산과 여자의 창조를 세부적으로 그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전체에서 세부적인 것으로 Zoom In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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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에서는 노동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진정한 낙원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가운데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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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타락이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했었고 그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름을 지으며 에덴 동산을 청지기로서 잘 관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파괴자가 되었죠.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지혜와 지식과 역할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얼마나 자존감이 높아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대한 청지기적 의식으로 충성을 다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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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절은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에 관한 것과 결혼에 관한 내용입니다. 1:27절을 자세히 보충해주는 문학 기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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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재료는 흙, 여자의 재료는 남자의 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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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은 타락전 세상의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타락 전 세상의 모습을 전체 성경에서 너무 짧게 보여 준다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모세에게 이 만큼만 기록하게 하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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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절은 결혼의 원리를 보여 주네요.
1.
결론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입니다.
2.
결혼은 동등한 두 인격의 완전한 연합 (한 몸)입니다.
3.
결혼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서 순전한 기쁨 (innocent delight)을 누립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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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을 보여 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이런 세상인지를 설명해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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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5절은 최초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바라보진 못했지만, 여자의 후손 (단수- 그리스도)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Crush) 할 날을 고대했을 것입니다. 이 선언이 뱀에게는 저주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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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이후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여자의 후손이 어떻게 뱀의 (사탄) 머리를 깨부쉬는지의 구속의 드라마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모든 권세를 깨뜨리셨고 승리하셨으며, 재림시에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사탄을 불과 유황못에 던져넣고 (20:10), 사망과 음부까지도 불못(the lake of fire)에 던져 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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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에 고난과 환난을 당하지만,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기에 강하고 담대하며 계속해서 전투적 교회의 성도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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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살인 현장과 살인자의 후예에 대한 기록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탄에게 귀 기울여 타락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아벨을 미워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향해 분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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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세상이지 않은가! 죽어 마땅한데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를 유리 방황하는 악한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보호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반역하고 죄악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성경 전체에 뒤덮여 있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구속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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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법과 우리 안에 작동하는 일말의 양심의 기능이 마비된다면 인간은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남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마음을 얼마나 주의해서 지켜야 하는지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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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서 시작해서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까지의 긴 족보입니다.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기록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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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서 주목할 것은 긴 수명, 그러나 모두 살고 죽었다로 끝납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 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아담의 반역의 결과죠.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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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사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샘플로 보여주신 은혜의 표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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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이름의 뜻이 히브리어 “안식, 쉼”과 비슷합니다 (29) 그가 저주받은 땅에서의 일과 수고에서 안식을 줄 자로 소개됩니다. 노아는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안식을 가져 온 분이시며 안식으로 이끄시는 여호수아와 같은 분이십니다.
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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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의 120년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120년이 될 것이라는 해석보다는 120년 후에 노아 홍수의 심판까지 지상에 사람들이 살 것이라는 해석이 더 문맥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노아 홍수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120년을 넘게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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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의 악함으로 인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시고 한탄하신다 (1-8). 성경의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해 주는 부분이다. 11-12절에서는 전적인 부패 (corrupt) 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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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8). 그에게 은혜를 입을만한 조건, 선행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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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9절 이후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를 준비해서 방주를 짓는 사양을 말씀해 주시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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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악이 관영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길이 살 길이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 참 악하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에게 소돔에 사는 의인 롯처럼 고통이다.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지금을 사는 것이 곧 방주를 짓는 삶이다.
창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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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악한 인간으로 인해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셨다. 노아와 그의 가족 본인 포함 8명을 남겨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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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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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시고 (죄악을 제거)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를 통해 다시 새롭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류를 만들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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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구원의 패턴이 발견된다. 한 사람 의인 노아를 통해 그의 온 가족이 구원받는다. 한 사람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노아의 가족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노아로 인해 구원받았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노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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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심판은 최후 심판을 미리 보여 준다. 그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고 새창조의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성경에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패턴을 계속 반복된다.
창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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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홍수가 그치고 하나님이 땅을 말리신 후 노아와 그의 가족과 방주에 탓던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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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처음 한 것이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흠향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 주시고 그와 (인류의 대표로) 언약을 맺는다 (9;1-17). 노아는 제사장이었고, 그 세대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선지자였고 홍수 이후 땅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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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리고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예수를 믿는 새로운 인류의 머리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되신 분이시다.
창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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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 창세기 1:28절과 동일한 명령을 주신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8.17; 9.1, 7)”. Fresh Restar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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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무지개를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다. 무지개를 볼 때 마다 노아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며 영원히 지키시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 역시 새언약의 표징 (표와 인) 이다. 성례에 참여할 때 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심판이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림을 깨닫고 확신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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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류의 대표인 노아는 다시 죄를 짓고 그의 죄로 인해 그의 아들 가나안이 죄를 범하고 저주가 선언된다. 그러나 셈과 야벳의 아버지의 죄를 가려 주는 행위로 그들에게 복이 선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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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노아 홍수 심판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8.21).
창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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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아들들 셈, 함과 야벳의 족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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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의 후손들을 보면 가나안 족속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원수로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히던 악한 종족 블레셋, 가나안 족속이 함의 후손이다. 노아에게 범죄했던 함은 하나님의 경건한 계열 (여자의 후손) 을 대적한 것이 되어 역사 속에 뱀의 후손의 계열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족속이 되고 만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하는 것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들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십자가의 구속의 패턴을 점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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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노아→ <셈, 함, 야벳>→ 홍수 이후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말해 준다. 구체적인 자손들의 이름의 기록은 성경의 내용이 문학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실제 역사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사람을 만드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참된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족보 이야기 (창 4, 6,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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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는 족보가 여러개 나옵니다. 족보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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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까지 나온 족보를 바탕으로 하면, 아담- 아벨(죽고, 4:8)- 셋(4:25)-노아- 셈(6:10) 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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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에 가면 셈의 족보가 다시 나오는데 셈-> 아브라함으로 이어집니다.
이후는 여러분도 잘 아시죠. 아브라함->야곱-> 유다->다윗-> 예수 그리스도 (마 1)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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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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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족보를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경건한 자손의 계열" 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경건한 자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오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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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때 처럼 이 악한 세대에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경건한 자손들을 주님 오실 때까지 보전해 가실 것을 바라보며, 오늘도 소망의 하루를 보냅니다.
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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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벨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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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뭉치면 하나님을 대적한다. 벽돌과 역청은 지금으로 치면 당시의 AI 기술이다. 돌과 진흙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기술 덕분에 바벨탑을 하늘로 높이 쌓을 수 있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흩어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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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바벨탑의 심판이 역적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흩어졌던 각 나라 방언으로 통역되어 선포된다. 복음 안에서는 한 주, 한 성령 아래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복음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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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AI 자동 번역, 통역 덕분에 언어가 하나가 되고 있다. 분명 인간은 다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것이다. 인본주의의 극치로 치닫을 게 불보듯 뻔하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그런 인간들을 심판하실지 모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지 않는 인간의 기술과 노력에 의한 통합과 통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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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절은 셈의 족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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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의 족보는 창세기에서 세계의 시작, 인류의 시작에서, 족장시대의 시작 (이스라엘)을 알리는 아브라함 가족에 대한 배경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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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회복해 가시는 지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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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 데라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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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 아브람, 나홀, 하란 (→ 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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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아내: 사래, 나홀의 아내:밀가 (하란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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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에 사래가 자식이 없다는 것은 복선이다. 이것 때문에 이후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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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이동: 갈대아 우르→ 하란 (경유지), 목적지는 가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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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저자는 서서히 하나님의 구속의 시작의 서사를 시작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다. 주인공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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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벨탑의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창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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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언약을 하신다. 아브람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 갔다가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 들통이 나 쫓겨 나지만 이미 바로에게서 받았던 소유물(짐승)을 들고 나온다. 이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많은 탈취물들을 들고 나오는 구원의 패턴을 그대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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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3절은 <아브람 언약> 이라고 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절이며 다른 성경에서도 이 부분을 직 간접적으로 많이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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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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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민족을 이루게 하심, 복이 되게 하심, 복의 통로가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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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절에서는 땅에 대한 약속도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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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은 이 약속이 어떻게 이루질지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겠지만 약속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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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적으로 이삭→야곱→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서 이방 나라들 가운데 구별되었고 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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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성취는 일시적이었고 사라졌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복이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셀 수 없는 수 많은 성도의 무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에 의해 영원한 복과 저주가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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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기근으로 이집트로 간다.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지만 들통나고 쫓겨 난다.
창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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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은 눈에 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였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머물렀다. 이것이 롯과 아브람의 차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약속을 따라 사는 자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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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과 땅을 약속하신다. 15절에서 보이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약속은 영원하다. 이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 상징하는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 안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창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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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에 살던 롯과 그의 가족이 네 왕에 의해 잡혀 가게 되는데 아브람이 집에서 기른 318명으로 네 왕들을 대파시키고 도로 찾아 옵니다. 그때 멜기섹덱이 아브람을 축복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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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가장 높은 하늘과 땅 (천지= 우주 만물 상징)의 주재 (소유자, Possessor) 이시다.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임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록 하나님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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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은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이후에 야곱도 28장 베델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성막과 성전이 있기 전에 십일조를 드린 것은 십일조가 성전이 있을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대표성, 상징성의 원리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다 바쳐야 하지만,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전부를 다 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성전과 제사를 유지하기 위해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폐지 되었으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신앙 고백적 의미에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바람직한 헌상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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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4장에서는 나오는 멜기세덱 (나의 왕은 의로우시다) 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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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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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면서 제사장인 평화의 왕 (살렘왕), 의의 왕이면서 제사장이 가리키는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히브리서 7장에서 신약 저자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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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도는 14장의 전투에 대한 이해를 도와 준다.
창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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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 (12장에서 하셨던) 을 의심하는 아브람에게 다시 약속을 하시고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고대 근동의 계약법과 유사하게 쪼갠 짐승 사이로 여호와 홀로 횃불로 지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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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믿음없음이 여실히 드러나지만, 하나님이 그의 믿음조차도 성숙시켜 가시는 장면입니다. 분명 이 장에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별명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떻게 자라게하시는지 그리고 믿음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이 아브람을 성장시키시는지가 관전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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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하나 없는 아브람에겐 하나님의 약속은 멀고 불가능한 공수표같아 보일 수 있지만, 신약의 저자에 따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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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신약성경이 완성된 복음 시대에 있기에 하나님의 이 약속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는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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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쪼갠 희생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쪼개져야 될 짐승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셨던 약속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신실하게 지켜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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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8 에서 아브람에게 하신 이 약속을 아브람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해설합니다.
창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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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으로 이루려 했듯이 사래도 조급해져서 심지어 화가난듯 하나님의 약속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 여종을 통해 자손을 보려합니다. 아브람은 그 옛적 아담이 하와의 말에 그대로 순종했던 것처럼 사래의 요청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고 바로 잡아야 함에도 그 말을 듣는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언제나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시도하고 그 속삼임에 귀를 기울일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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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은 자신이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자 본처 사래를 멸시합니다. → 사래는 남편 아브람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습니다. 신약의 저자는 사라를 남편에게 복종한 아내의 예로 든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 가정에서 아브람의 가장의 리더십이 부재해 보입니다. 사래에게 이 문제에 있어 전권을 위임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합니다.→ 하갈이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갑니다. 악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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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주의 사자의 명령으로 다시 하갈은 아브람에게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아브람에게 났지만, 이들의 후손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자가 되죠. 아브람에게 낳지만 약속의 자녀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구속사를 잇는 경건한 계열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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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이 만난 하나님, 고통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창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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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13년이 흐릅니다. 그 사이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말에 동조해서 인간적 방법인 하갈을 통해 하나님 약속을 이루려했으나, 오히려 가정의 고통만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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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십구 세때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 언약을 확고히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8) 며 불신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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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조차 아브람에게 의롭게 여김 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서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믿음 주시고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이삭을 드리는 믿음의 절정에 (22장) 이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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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 내 믿음 내 모습이 늘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여기시고 믿음에 믿음으로 최후 구원까지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샬롬(peac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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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 사래→ 사라 (열국) 로 바꾸어 주시며 할례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으로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증으로 보증으로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개혁신학에서는 세례를 구약의 할례로 봅니다. 형식과 시행법은 다르나 언약의 표와 인으로서의 원리와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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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약속과 은혜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인자와 성실)을 보여 줍니다.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불신하고 웃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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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때 아들 이스마엘과 그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동시에 할례를 받고 아마도 신음하며 뒹굴었을 모습을 상상해 보면 장엄함 속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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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믿음이 연약하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돗보입니다.
창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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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절: 사람 셋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일년 후에는 아들을 갖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사라는 숨어서 엿듣다가 속으로 웃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역시 인간의 한계에 갇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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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신의 반응과 상관없이 약속을 신실하게 행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죠.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죄악, 불신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아무 조건없이 택할 자를 택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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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생리가 끊어진 여성이 출산 할 수 없다는 이중 불가능은 아들의 출생이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예수가 잉태한 것이 하나님의 전능이 인간의 불가능을 뚫고 역사한 구속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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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절: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계획을 알리시자, 아브라함은 멸망을 막기 위해 ‘중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과 의인의 숫자로 딜 (deal)을 하는 듯한 내용입니다. 의인 오십명에서 시작해서 열명까지 내려가셔 결론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열명의 의인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악인을 멸하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과 의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간청이 두드러지는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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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역시 아담이 인류의 대표와 머리, 홍수 심판이후 노아가 새로운 인류의 대표와 머리이듯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택한 한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려는 새로운 인류 (이스라엘→ 교회)의 대표이자 머리입니다. 그는 영적 이스라엘의 아버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인물입니다. 소돔을 위하 그의 기도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요 17)와 같고,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중보기도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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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in him)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랴” (18) 라는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민이 복을 받는 것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이 약속의 최종적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창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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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멸망과 인간의 죄악에서 탄생한 두 민족의 기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드라마로 치면 막장 드라마입니다. 도시에 온 나그네를 성폭행하려고 몰려들고 자기 딸을 성폭행하도록 내어주고,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아이를 낳는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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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과 암몬은 롯의 두 딸의 범죄로 시작된 민족입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민족입니다. 영적으로는 죄악된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교회)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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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중에 태어난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죠. 그러나 성령으로 죄없이 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의와 생명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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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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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두 천사” 의 존재는?, 12절에서는 ‘그 사람들’ 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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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상 여호와와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두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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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왜 롯은 두 천사를 구하기 위해 자기 딸을 성 사람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까나? 이런 아버지가 인간인가? 성경은 이자를 왜 의인이라 했을까요? (벧후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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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택한 자를 구하시려고 기도를 듣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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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재림시 죄악된 세상이 받게 될 최후 심판을 미리 보여 주는 예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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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저자는 롯이 자기 두 딸이 연거푸 술을 먹이고 동침하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두번씩 강조합니다. 그 작은 도피처로 택한 작은 성에서도 술은 없어서는 안되었나 봅니다. 성경을 술을 금하지 않지만, 술취하는 것에 대해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때문에 함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술 취함은 온갖 범죄가 타고 넘어들어오는 발판이 됩니다. 성도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야 하겠습니다 (충만, 엡 5:18). 성령충만의 비결은 말씀 충만입니다. 우리 오늘 하루만큼은 말씀에 충만합시다.
창 20
아비멜렉, 아브라함과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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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많고 쪼잔한 아브라함이 똑같은 잘못을 다시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랄 사람들이 (세상) 무서워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그땅에 거주하려 합니다. 어떻게 자기 살자고 아내를 다른 남자 (왕)에게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을 믿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랄 땅에서든 애굽땅에서든 아브라함을 지키셨을 것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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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죄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아비멜렉을 심판하려 하셨고, 결국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만약 사라가 아비멜렉과 관계를 가졌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아브라함의 거짓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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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선지자’ 라고 여호와께서 아비멜렉에게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담과 노아처럼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의 기능과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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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학적으로 왕, 제사장과 선지자를 <그리스도의 3중직> 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사역을 대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그들의 인격과 사역이 완성되어지는지 최종 그림을 생각하며 읽으시면 성경이 전체적으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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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에서도 인간의 불신, 믿음의 연약함과 죄악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두드러지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드라마를 신실하게 홀로 써 가고 계심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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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약함, 실수, 죄악을 품으시고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시며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끄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창 21
아브라함 백세때, 사라가 이삭을 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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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때 사래가 이삭을 낳습니다. 자연적 출산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사래를 덮어 잉태하고 출산한 특별한 출산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즉 메시아가 오게 할 경건한 계열의 자손입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쫓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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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인간적 방법으로 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립니다. 이 사건을 신약이 해석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박해한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4:29절에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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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종용해 애굽여인이 낳은 이스마엘을 쫓아라고 하죠. 차마 이스마엘이 자기에게는 장자와 같은 아들인데 쫓아내지 못하고 고민하자 하나님께서 사라가 시킨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고대로부터 아내의 말을 잘 듣는게 바른 길인가 봅니다.^^). 사라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끔찍히 사랑해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마치 작가가 드라마를 써 내려가듯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율법과 은혜, 육체와 성령을 대조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해석해 줍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창세기를 어떻게 읽고 적용했는지에 대해 중요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
갈라디아서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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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 모두 여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 (사라)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율법으로부터, 죄의 종으로부터, 사단의 종으로부터, 육체의 종으로부터) 를 누리고 종이 되어 살지 맙시다.
아브라함과 아비벨렉이 언약을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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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의 세 번째 내용 (21:22-34)은 그랄땅 (블레셋)의 아비멜렉 왕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자기 후손들에게 잘 대해 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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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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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말,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 →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창 2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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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겐 생명과도 같은 백세 때 가지 귀하디 귀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죽여서 번제로 바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중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 한마리를 예비하셔서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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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의 순종으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릴 것을 믿고 순종했다고 주석하고 있고 (히 11:17-19)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1). 라고 주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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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어린 양” 이 어디있냐고 묻자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이 이삭 대신 불타는 희생 제물이 됩니다. 아직 성막과 제사 제도가 모세를 통해 주어지기 훨씬 전 속죄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삭을 대신해 드려진 “어린 양” 은 곧 그리스도를 모형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이라고 요한복음에서 기록했고, 요한 계시록에서도 그리스도를 “어린 양” 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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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절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언약을 더욱 확실히 보장하는 맹세를 하시는데 이 내용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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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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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씨” 는 복수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단수입니다. 바울은 이 씨가 곧 그리스도라고 갈라디아서에서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약속한 복의 근원, 복의 통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 (네 씨)가 사탄 (대적)의 나라를 멸하시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성문을 차지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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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던 모리아 산은 나중에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 이는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대학 3:1)이 지어지는 장소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악 지역에서 (완전 동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같은 지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구속을 완성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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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에서 깨닫는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할 어린양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번제할 어린 양으로 내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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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는 이처럼 복음이 씨앗처럼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하나님의 빅플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읽어 나갈 때 성경이 아하! 하고 재밌게 읽어집니다.
나홀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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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나홀의 자녀들에 대한 가계도는 그 안에 한 사람 “리브가” 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입니다. 바로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이기에 미리 자리를 깔아 놓는 내러티브의 장치입니다. 성경은 항상 이렇게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 있는 경건한 자손을 중심으로 흐르고 포커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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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교회가 세상 가운데 표가 나지 않는 듯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리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가 중심이라는 걸 깨닫고 오늘도 자부심 가운데 세상에서 힘차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 23
사라의 죽음과 장사, 아브라함이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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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막벨라 굴을 산 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한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많은 후손과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 믿고 행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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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 (4)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 막벨라 굴 말고는 소유한 땅이 가나안 땅에서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그는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았다고 했죠. 이 헤브론 땅은 이후 다윗이 기름부음 받고 다윗 왕조가 시작되는 곳이 됩니다. 물론 이삭과 야곱이 장사되는 곳이 기도 하구요. 이 세상에 사는 성도의 정체성도 “나그네와 거류민(임시 체류자)” 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 아버지 집,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집이 있습니다.
창 24
이삭이 리브라를 아내로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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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로 거주하는 가나안 땅이 아닌 자기 족속 중에서 고르기 위해 종을 보냅니다. 이것 역시 그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의 씨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기에 그는 이방 아내를 자식에게 맞이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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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를 얻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와 종의 기도의 응답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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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가문에게 시집 가기를 흔쾌히 자청하는 리브가의 마음이 돋보입니다. 그가 들은 것은 아브라함의 종에게서 들은 정보가 전부였지만, 그것이 그녀에게는 사모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녀가 떠날 때 그의 가족들이 축복한 말은 성령의 계시였습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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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창 3:15절의 성취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말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의 어머니가 되고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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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이나, 이후 야곱과 라헬의 결혼은 근친 결혼입니다. 그러나 계시의 초기의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허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로 부터 새로운 인류가 시작될 때에도 그랬고, 아브라함을 택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시작하는 초기에는 불가피한 상황이기에 한시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후 율법이 주어질 때 는 근친 결혼을 철저히 금지하셨고,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 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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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부터 50장까지는 야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치 콩가루 집안 같이 위태 위태한 가정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민족의 시초가 되는 열두 족속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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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 너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의 큰 그림의 시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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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는 것이 성경을 읽는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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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건한 계열인 아담-(아벨)-셋- 셈-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늘 머리속 한켠에 담아 놓고 보시기 바랍니다.^^
창 25
아브라함의 죽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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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만장한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해 많은 후손을 났았습니다. 그중에는 나중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족속도 있네요. 역시 하나님의 선택한 자녀 (경건한 계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오직 약속의 자녀인 ‘이삭’ 에게 집중하십니다.
이스마엘의 족보 (12-18)
에서와 야곱의 출생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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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복 중에서 둘이 다툽니다. 리브가가 여호와께 묻습니다. 그 대답이 그 유명한 23절입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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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선택을 잘 말해 줍니다. 복 중의 두 아이는 그 무엇도 행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무조건적 선택을 설교하면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 (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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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유기된 자)이 하나님의 예정이면서 동시에 에서 자신의 완악함때문임을 곧 바로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삭에게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경외한 여호와 하나님도, 그분의 약속도 Don’t care 였습니다. 그것이 장자의 명분을 당장 허기진 배를 채워줄 팥죽 한 그릇에 내동댕이치는 망령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런 불신과 잇따른 행동이 그를 버림받게 만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은혜에서 제외된 자의 경고성 예로 에서를 들었습니다 (히 1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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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야곱은 간사하고 속이는 자였지만, 그는 부모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장자의 명분을 너무 사모한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영적이 사람이었고 영원을 바라본 자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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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날때에 붉고 털이 많아 ‘에서’ 라 불렸고, 팥죽을 보고 ‘붉은 것’ 을 달라고 해서 ‘에돔’ 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붉게 태어나서 붉은 것 때문에 망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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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동일합니다. 이땅에 살면서 나그네와 거류민임을 잊고 하늘과 영원을 사모하지 않고 이땅의 ‘팥죽’에 하늘의 시민권을 팔아 넘기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야곱처럼 우리의 인생이 많은 실수와 죄로 점철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을 사모하며, 하늘의 기업, 하늘의 장자권을 사모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신자의 지상 삶의 본질입니다. 그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창 26
블레셋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이는 이삭과 하나님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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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20장과 거의 동일합니다. 아브라함의 죄를 그대로 자식이 반복 재현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죄로 인해 위협을 받지만 하나님이 지켜가십니다. 아브라함이 대적의 땅에서 거부가 되고 형통한 것은 이삭의 행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와 성실때문임이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창 27
이삭이 에서대신 야곱을 축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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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서 이삭의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암시입니다. 육신의 눈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영적으로도 어두웠습니다. 25:23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에서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편애) 마음에 따라 축복하려고 합니다. 가정의 불화와 비극은 부모의 자식 편애에서 나옵니다. 이후 야곱의 요셉 편애때문에 그의 가정이 불화하는 것에서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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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한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는 리브가는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고 실천했던 자입니다. 분명 약속의 자녀는 야곱이거든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삶을 사로잡았던 건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었습니다. 정말로 여호와를 믿었고 그에게서 복받기를 사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따라 그들의 간계와 거짓의 죄가 있음에도 그들을 따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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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 (27-29)과 에서를 저주한 말 (39-40)은 계시입니다. 이삭이 선언한 대로 이루어 집니다. 그런면에서 이삭 역시 하나님의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축복하고 저주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의 입술을 통해 계시하고 가르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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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복을 가로챈 아우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은 가인과 아벨에게로 올라갑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자 시기심으로 아벨을 죽였던 가인처럼,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악한 자, 망령된 자이며 멸망받을 자입니다. 그는 애초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던 자입니다. 단지 세상적인 복을 받기 원해 하나님의 복을 구했던 기복 신앙만 있던 자였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의 전형입니다.
창 28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는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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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야곱에게 이삭이 복을 선언합니다. 그의 복의 선언은 성령께서 그의 입에 두셔서 하게 하신 계시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약속하는 땅, 자손과 복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을 최종 목적지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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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언약을 야곱과 다시 갱신하십니다. 그 내용인 13-15절은 내용 자체를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역시 땅과 많은 자손과 복 (하나님의 다스림)과 복의 통로가 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께서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에서 시작되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되었고 종말의 재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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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에서 야곱이 본 꿈은 나중에 그 사닥다리가 자신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하늘과 지상을 잇는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임재했음을 알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로 ‘벧엘’ 이라 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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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배를 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그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성막과 성전이 생기기 전에 아브라함, 야곱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의 십의 일을 드리는 헌상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봅니다. 내게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떼어 드린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며 믿음의 표현임을 알게 됩니다.
창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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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35장까지는 야곱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우물가에서 만나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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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양을 몰고 오는 라헬: 여인으로서 녹녹치 않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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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난 것처럼 야곱 역시 우물가에서 라헬을 우연처럼 조우합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죠. 아브라함의 종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이끄심이었습니다. 가끔씩 성경은 이럴 때 ‘마침’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물가에서 만나는 모티브는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생수를 마시라고 하신 것에서 이 그림은 완성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갈증과 생존을 위해 우물가 (먹고 사는 문제)를 찾아 헤메이나, 진정한 영혼의 해갈과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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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사랑의 힘입니다.^^ 라헬을 향한 사랑이 7년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며칠이라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았습니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다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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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자 (야곱)이 크게 속았습니다. 하지만 비극의 시작입니다. 언니 동생이 같은 남편을 두게 되고, 조금 뒤에 나오겠지만 그들의 여종들까지도 첩이 되어 아들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지독히도 라헬을 편애합니다. 이런 집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시초인 열두 지파가 탄생한다는 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생생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가 아들 넷을 낳다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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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아들의 이름들이 다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레아에게 연민과 동정이 많이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 아니라 미움받던 레아, 야곱의 본처를 통해 먼저 아들 넷을 르우벤 (1), 시므온 (2), 레위 (3), 유다 (4) 주시는데.. 선지자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가문인 레위 조상, 그리스도가 나온 유다 조상이 모두 레위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의 주인공은 인간의 사랑을 받은 라헬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신 ‘레아’ 였습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창 30
야곱이 레아, 빌하, 실바, 라헬에게서 일곱 아들과 딸 하나를 낳다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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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낳지 못하는 라헬은 질투심과 경쟁심에 불탔고, 원망과 사납기까지 합니다..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요구를 남편에게 합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했던 죄가 다시 반복됩니다.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순종했어야 하는데 굴복합니다. 그렇게 해서 라헬의 종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이 단 (5)과 납달리 (6) 입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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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부터 자식 낳기 경쟁이 시작됩니다. 레아도 질새라 여종 실바를 주어 갓 (7)과 아셀 (8)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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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합환채 (당시 불임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고 알려진 식물)를 가지고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래합니다. 완전 콩가루 집안입니다. 그렇게해서 레아가 낳은 아들이 잇사갈 (9), 다음이 스블론 (10), 그 후 딸 디나를 낳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라헬을 위해 요셉(11) 을 주십니다. 이때 야곱은 91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비극적 죄악 가운데 열한 명의 야곱의 아들이 태어 납니다. (9-24).
야곱의 양떼와 라반의 양떼 (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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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이 야곱의 독립을 못하게 하자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특이한 방법으로 자신의 양떼를 늘여 가축 부자가 됩니다. 그의 방법이 과학적으로 (유전학적) 타당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방법도 결국엔 속임수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꾀가 역사(?)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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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의 택한 백성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잔꾀와 속임수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라반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할 때였는데 라반이 방해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을 약속의 땅으로 보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이루어가시려는 과정에서 야곱의 악을 허용하신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야곱의 악을 조장하시거나 부추키시거나 정당하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 31
라반이라는 큰 산을 하나 넘은 야곱:야곱의 도주와 적발 그리고 언약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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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라반 몰래 도주하지만 곧 따라 잡힙니다. 라반의 임금 착취, 부당한 노동 착취를 낱낱이 고발하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했기에 오히려 자기를 부하게 하셨음을 설파합니다. 야곱에게 라반은 큰 산이었습니다. 속임수에 있어서는 자기보다 고수인 라반을 만나 20년을 생고생을 했죠. 그야말로 서로 속고 속이는 전쟁을 치루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손에서 풀려난 건 그의 도주 전략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를 보호하시고 사려 주신 것입니다. 때가 차매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돌려 보내신 겁니다. 인간사는 하나님의 구속사로 위에서 내려다 보면 해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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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약속의 자녀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꿈으로 대적에게 나타나 보호하시는 하나님 역시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사라와 리브가를 보호하기 위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신 것, 잉태한 마리아로 인해 고뇌하는 요셉에게 현몽한 천사등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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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절: 경솔하게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라헬은 야곱의 맹세대로 라헬은 죽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한 맹세는 반복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입다의 맹세로 인해 그 딸이 죽은 경우입니다. 많은 경우 맹세는 어리석고 교만하고 이기적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입니다. 그러면 그렇다하고 아니면 아니다 하면 될 뿐입니다. 자기말과 자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부모의 이름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국가의 이름으로도, 자기 신체나 생명을 걸고서도 결코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경우 맹세가 금지된 건 아닙니다. 53절에서 야곱은 라반과 언약을 맺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죠.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는 데 그러한 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에서 나온 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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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 라반을 넘었지만 야곱이 극복하고 넘어야 할 진짜 큰 산인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 32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준비를 하고 브니엘(얍복 나루) 에서 씨름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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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그의 인생에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습니다. 라반의 문제를 넘은 야곱 앞에 더 큰 산 에서가 있습니다. 거짓말과 연기로 장자권을 도둑질한 형 에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넘어야 할 산들이 있는데 그것은 늘 언제나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찾아옵니다. 에서를 맞이하는 야곱은 그 답게 발생할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그에 따라 철두 철미하게 준비합니다.(3-5, 8, 13-23).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수록 인간적인 계획과 준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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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는 에서의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 하다 여호와께 매달립니다 (7-11). 삶의 위기에서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야곱의 영적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12절에서 주님의 응답을 보면 주님도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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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이 놀라운 건 야곱의 두려움 앞 뒤로 하나님의 사자 (군대) 와 (1-2)그를 만나고, 하나님과 같은 어떤 사람이 그와 씨름하고 축복합니다. 야곱의 인생에 큰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이후 야곱은 에서를 정면으로 대면할 용기를 얻고 나아가게 됩니다 (33:3)
야곱이 겨룬 어떤 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3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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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어떤 사람인데 야곱과의 대화의 내용과 그의 행동을 보면 그냥 사람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그를 하나님으로 여겼고, 복을 받기 위해 사투를 벌입니다. 마침내 복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이름이 개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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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데 하나님 같은 존재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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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2:3–4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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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언급한 호세아 선지자의 글에 따르면 야곱이 겨룬 사람은 천사 (하나님의 사자)이며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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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이 존재를 아브라함에게 찾아왔던 세 사람 (창 18장) 처럼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성자) 지상 현현(온전한 육체를 입고 온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신 성자 하나님) 으로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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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여기에 동의합니다. 확정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야곱과 겨룬 이 존재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대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야곱은 이를 통해 하나님과 대면하였고 그의 얼굴을 보았으며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의 역할이 암시). 죄인인 인간과 다시 함께 하시려는 임마누엘의 은혜와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대주제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사시고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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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이스라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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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처럼,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의 인생에 대전환점이며 하나님의 계시적 측면에서도 큰 전환점입니다. 이때부터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적 성격으로 전환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머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의 시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을 그렇게 높이 여기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영적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기에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창 33
야곱과 에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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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고 야곱은 대열을 나눕니다. 여기에서도 야곱의 편애와 차별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 레아와 그의 자식들 → 라헬과 요셉을 제일 뒤에 두고 에서에게로 나아갑니다. 사랑할 수록 위험의 요소에서 멀리 띄어 둡니다. 이때 종들의 아들 레아의 아들들이 야곱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풍었을까를 생각해 보니 아들들이 받았을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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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에서 에서가 달려와 야곱을 끌어 안고 입맞추고 우는 장면은 참 감동적이네요.이런 모습을 보면 에서가 성품적으로 더 성숙한 것 같습니다. 이미 아우를 용서하고 그를 받아 주는 따뜻함과 정이 많아 보입니다. 인격적으로도 에서가 야곱보다 높습니다. 에서 역시 거부입니다. 사백명의 장정을 거느릴 정도면 거의 작은 영주 수준입니다.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 오히려 그 장자권때문에 죽을 고생을 20년 동안 라반밑에서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한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영적인 의미로 보지 않으면 혼란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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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함께 가자는 선처에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계산을 했던 야곱은 숙곳이라는 곳에 거주하다가 세겜이라는 곳에 안주합니다. 이것이 또한 비극의 서막이 되고 말죠. 야곱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계산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인해 인고의 세월을 만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나누긴 좀 곤란하지만, 저도 돌아보면 야곱같은 인생을 살았던 삶의 단면들이 많습니다. 나의 계산과 계획을 따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맛 보았던 쓰라림들의 장면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창 34
디나가 당한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자행한 시므온과 레위의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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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과 학살 둘 중 어떤 죄가 더 클까요?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시몬과 레위의 속임수와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악한 인간이 스스로 심판자나 복수자가 되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죄악상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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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식들의 악함에 대한 야곱의 대응은 어쩌면 더 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오로지 자기와 자기 식구 지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외에는 이런 살상극에 대한 죄의 심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망치고 있는 장본인은 야곱입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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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들은 자기 민족의 조상들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과연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을까요? 시몬과 레위의 악행속에 인류의 잔인성과 폭력성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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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레위 족속에게서 제사장 아론과 모세가 나왔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백성들의 죄를 중보하는 제사장의 직분이 이어진다는 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자비만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러 다녔던 바울을 강권적으로 택하셔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창 35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라헬과 이삭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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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치는 자녀들을 수습하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때처럼 야곱이 친 사고를 수습해 주십니다. 세겜과 그 주변 족속들의 보복을 당해 진멸당할 위기를 하나님께서 막아 주십니다 (5).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던 (사닥다리 꿈) 벧엘 (하나님의 집)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십니다. 결국 신자가 가야할 곳은 하나님의 집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행하는 삶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삶입니다.
창세기 35:11–12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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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의 삶의 한 틈 한 틈 간섭하셔서 일방적으로 야곱에게 복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다시 재천명하십니다. 창 1:28절의 지상 문화 명령이 반복되네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이 명령은 교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주님 오실때까지 땅끝까지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의 종결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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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속은 12 아들→ 출애굽→ 가나안 땅 정복 → 다윗→ 솔로몬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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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이로써 12피파의 조상들이 완성됩니다. 슬픔의 완성이라고나 할까요?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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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 하면 인간의 죄악상이 나타납니다 (22).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의 아내 (첩) 와 성범죄를 저지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장자권은 박탈당하고 유다에게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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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은 야곱이 마침내 고향땅 헤브론으로 돌아오고 이삭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29). 아브라함도 그렇지만 이삭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이 땅에서 차지한 건 아마 한평도 되지 않는 무덤뿐입니다. 약속을 믿고 본향을 바라보며 죽었습니다. 신자의 삶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차지할 땅은 한 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이 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 우리의 집이 있고 그 땅은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며 하나님과 영원토록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은 기독교는 땅의 복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입니다. 기독교는 하늘의 복,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복을 믿음으로 누리는 종교입니다. 복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때 성경이 말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 36
에서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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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분량을 에서의 후손들의 명단으로 꽉 채우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 라고 마칩니다. 이삭의 저주를 받은 에서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부유하고 많은 자손들과 땅도 차지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아쉬운 것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다 성취된 것 같습니다. 한 가지만 빼구요.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누리는 복만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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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저자는 반복해서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을 고발합니다. 부모 이삭과 리브가를 걱정하게 했고, 그는 이방 결혼을 통해 야곱과 경쟁하기 까지 합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이런 이방인들과 혼합된 결혼에서 나은 자녀들이기에 정통성이 결여 되고, 약속의 자녀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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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야곱은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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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의 소유가 너무 많아 함께 거주할 수 없게 되자 에서가 자발적으로 떠납니다. 여기서도 에서의 양보심과 나이스한 성품이 돋보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은 이기적인 듯 가나안 땅, 부모가 거주하던 땅에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야곱과 에서의 신앙의 차이 유무가 삶으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에서가 떠난 건 하나님의 약속을 등진 거죠. 그 땅 버리고 자기 눈에 좋은 땅, 자기가 개척하고 싶은 땅으로 이주한 겁니다. 그에 반해 야곱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 붙잡고 하나님의 복을 추구했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끄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남은 것은 이기적 발로가 아니라 그의 신앙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자리에 남는 것이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삶이 영원히 복받는 인생인 줄 믿습니다!
복음으로 읽는 창세기
창 37-42
1.
창세기 25장~36장까지는 야곱이 스토리의 중심이었다면 37장부터 창세기 마지막 50장까지는 요셉이 중심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구속사에 있어 참 중요한 인물입니다. 요셉의 스토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요셉의 신데렐라같은 인생 스토리와 요셉 자신의 탁월함에 맞춰 영웅스토리나 설교로 만들지 말아야 함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통해 약속을 성취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로 인한 요셉의 신앙 고백에 주목하며 읽어나가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읽는 관점이 그렇지만요.
2.
요셉과 그의 인생은 여러부분과 패턴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해주는 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의로운 자가 악인에 의해 무고하게 고난받고 죽임 당하는 모습 (다윗왕-> 시편 기자 ->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과 선지자 ->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리키는 전형입니다.
3.
그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그대로 성취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시초가 되는 족장들의 왕일 뿐만 아니라 열방의 (당시 애굽) 왕이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나라를 지혜로 다스리는 모습이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입니다.
4.
창세기는 책 제목처럼 모든 것의 시초를 담고 있는 기원의 책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의 모든 스토리를 말씀을 통해 알고 있기에 구원의 드라마의 결론을 이미 알고 1막 1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복음을 더 의미있고 풍부하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시작, 인류의 시작, 죄의 기원,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및 주변 이방 민족의 시작에 대한 역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5.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를 통해 이 성경을 읽어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때에도, 포로에서 돌아와 제2성전 시대를 살던 유대 백성들에게도 창세기는 그들의 뿌리를 알게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은 참 신앙 가운데 메시아를 기다리며 영원한 나라를 대망하며 주어진 하루를 감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6.
창세기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씨, 그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 성도들의 역사이기에 우리들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창 37
꿈꾸는 자 요셉, 요셉을 죽이려다 노예로 판 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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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중심은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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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고자질’ 은 미움을 사게 되어 있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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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편애의 왕” 입니다. 라헬에 대한 편애가 그녀의 아들에게로 넘어갑니다. 요셉은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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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10절: 야곱은 정작 꾸짖어야 할 때는 하지 않고, 꾸짖지 말아야 할 때는 꾸짖는 영적인 분별력이 뒤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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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이 양치러 간 곳은 다시 그곳입니다. 잔혹한 학살의 현장이었던 ‘세겜’! 벌써 불길한 예감이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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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요셉이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 ‘선지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미움을 받아 동일하게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렘 38:6; 예레미야 애가 3:53 참고). 요셉의 형들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었지만 지금 이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고 죽이려는 원수들,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자들이고 사탄의 졸개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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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팔아 넘긴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할아버지 이삭의 이복 형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을 미디안 상인이라고 표현하는데, 역사가 이렇게 흘러갑니다. 약속의 자녀 (은혜) 세상의 자녀 (율법)에게 팔려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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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 은 이십에 요셉을 파는 장면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은 삼십에 파는 장면을 생각나게 하네요. 요셉의 인격과 그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도 고난받는 의인이 무고하게 죽임 당하고 팔려가는 모습은 시편 기자를 비롯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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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형들의 악행은 분노를 자아냅니다. 그들이 요셉을 죽이진 않았어도 죽인 거나 진배 없습니다. 거짓말로 요셉의 죽음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아버지가 슬픔 가운데 죽게 되었도다 말할 때조차 거짓 위로를 하는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나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요셉도 죽이려고 했고 아버지를 심정적으로 죽이는 이중 살인자들이었고, 한 마디로 패륜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을 판 형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온 조상인 유다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 선택이며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임을 생생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은혜에 몸서리 치며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믿기로 작정해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믿어지게 하신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창 38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죄악 가운데 베레스가 출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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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야곱 집안의 막장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죄악 가운데 죽은 아들 엘의 아내인 다말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 베레스가 출생합니다. 이 아이가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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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타락상은 극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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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일 먼저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을 보고 관계를 가지고 아들 셋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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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장 시대에도 이미 형수취수제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에게 자식을 대신 낳아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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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인줄 모르고 성관계를 가진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창녀에게 성매매를 통해 관계를 가졌습니다. 당시에 유다가 성적으로 영적으로 지독히 타락한 상태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 부패성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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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 역시 그가 아무리 의롭다 하더라도 이유 불문 시아버지를 속이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으려고 관계를 가진 것 역시 패륜적 행위입니다. 과거에 롯의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낳은 행위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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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걸 알고 끌어내어 불태우라고 화를 냈던 유다의 모습은 밧세바를 임신시키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였던 다윗의 죄를 들추어 낸 나단 선지자에 대한 다윗에게서 재연됩니다 (삼하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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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다말의 범죄와 이방 여인 가운데 태어난 베레스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함과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가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지금 나의 삶을 보아도 구원받은 자이지만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외적 내적으로 악한 죄를 짓고 사는 나 자신을 보면서,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를 절실히 깨닫습니다. 마태복음 1:3절에 “유다는 <다말> 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에서 다말의 이름을 발견할 때면 하나님의 은혜에 전율하게 됩니다.
창 39
보디발의 아내의 성적 유혹과 모함으로 옥에 갇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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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공식을 가지고 요셉을 이야기를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이다 (예표적 인물)라는 것은 요셉의 인격, 삶의 패턴, 그의 역할등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사역을 예를 들어 보여줍니다 (예표).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모형적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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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는 요셉은 “고난받는 의인”,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 의 고난의 전형입니다. 몇주전 설교에서 전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죄없으신 분이 무고하게 십자가형을 받고 고난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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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가 형통하였다”(2,3,21,23)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형통” 하셨습니다. 그분이 형통하셨다라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성공”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형통한 것입니다. 순교를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죽는다면 그것이 형통한 삶입니다. 우리의 형통(성공) 은 이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 하늘에서 승부가 나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형통은 일반 은총 가운데 불신자에게도 주어지고, 신자에게서도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에게서 복 받은 여부를 절대 절대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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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하는 삶이 주님께서 함께 하는 동행의 삶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 주와 함께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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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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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재판도 없이 아내 말만 듣고 감옥에 보내는 건 불의합니다. 무고하게 옥살이. 고난받는 의인의 모습은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 때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 가정, 직장과 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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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삶으로 전하는 복음전도; 복음전도의 핵심은 성도가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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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장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두드러집니다. 바로의 두 관리들이 요셉이 갇힌 옥에 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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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자가 꿈을 해석하는 자로 바뀝니다.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 꿈을 해석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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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실 때, 술 관원장은 그의 직업에 맞게 포도나무로, 떡 굽는 관원장에게는 떡 바구니로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꿈의 작가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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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저: 무고하게 옥에 갇힌 것을 처음으로 술 관원에게 탄원하는 요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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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꿈 풀이대로 이루어지지만 술 관원은 요셉이 기억해 달라는 말을 잊어 버립니다. 사람이 이렇죠. 다급할 때는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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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서 만나 인연과 요셉의 꿈 해석의 역량이 나중에 바로를 대면하고 그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가 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과 그 가운데 만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한 단면임을 기억하고 산다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창 41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총리가 되어 애굽을 다스리며 구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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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 꿈을 꾸고 번민하자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추천합니다. 요셉은 명쾌하게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려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풍년의 때에 흉년을 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이에 총리가 되어 이를 요셉이 직접 실행하여 애굽을 구해 줍니다. 바로가 준 제사장의 딸에게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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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만큼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고난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를 영웅화하고 요셉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신실하면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이런 걸 기복 신앙, “고지론” 이라고 하지요. 물론 요셉의 신앙과 그의 삶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고난받는 의인을 통해,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 (이스라엘, 교회)이 구원받는 스토리, 그 사람의 지혜롭고 명철한 다스림 가운데 온 세상이 구원을 받는 왕의 스토리입니다. 요셉의 이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가리키며 그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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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큰 그림, 하나님의 빅 플랜에서 내려다 보면, 요셉이 형의 미움을 받아 애굽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고,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거기서 관원장들을 만나 꿈을 해석해 주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면서 총리가 되어 애굽과 온 세상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 (구원)을 한 스텝 한 스텝 밟아가시는 섭리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자손”, 즉 “하나님의 백성” 을 만들어 가고 계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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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 요셉을 칭송하며 그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이라고 하며 그의 지혜와 명철을 칭송합니다. 그리고 총리로서 애굽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합니다. 왕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령을 받고 (기름부음 받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며 직분 (office) 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때 요셉의 나이 삼십세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와 비슷하네요. 공생애 사역 시작 때 성령을 기름붓듯 세례 때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신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고, 지혜의 원천이시자 (잠언 8),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그의 충만한 지혜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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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의 신앙의 본으로서 요셉의 이야기를 적용할 수 있고, 어떤 부분 (대부분)은 요셉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교회와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 건전한 성경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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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은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섭리의 장치입니다. 야곱 족속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60만 대군이 되어 나오게 된 결정적 장치가 가나안 땅에 기근이었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고난은 때때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장치입니다. 각자의 삶을 돌아봐도, 나의 삶을 돌아보다 참으로 그런 때가 많았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앞으로 인생 가운데 만나게 될 우리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며 맞이해야 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신앙과 욕심 때문에 받는 고난을 자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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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상식: 요셉의 두 자녀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여호수아서부터 열왕기상하에서 계속 나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을 분배할 때는 레위지파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 지파에게는 그 아들 둘을 각각 한 지파씩 분배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우어졌을 때는 때때로 북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에브라임” 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창 42-44장
줄거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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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 곡식이 떨어지자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하고 애굽에 보내 곡식을 사오게 합니다. 거기서 요셉을 대면하나 알아보지 못하고 요셉의 꿈대로 왕을 대면하듯 경배하고 곡식을 사 옵니다. 요셉은 사랑하던 동생 베냐민을 봅니다. 요셉의 계략으로 스파이로 몰리게 되고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을 들은 야곱은 베냐민마저 잃을 수 없어 결코 보내지 않습니다 (42장). 그러나 기근이 더욱 심해지고 사 온 양식이 다 떨어지자 결국에는 베냐민을 함께 보내 곡식을 사러 보냅니다. 드디어 요셉은 베냐민을 만나고 열두 형제들이 한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43장). 요셉의 형들의 즐거움도 잠깐, 이번에도 요셉의 계략으로 베냐민의 부대에 은잔을 넣고, 베냐민을 잡아두려고 합니다. 이때 유다가 자신이 모든 희생을 치룰 때니 아버지 야곱을 살리기 위해 베냐민을 보내 주라고 하면서 44장이 끝납니다. 우리가 성경의 뒷 이야기를 모른다면 다음 회가 무척이나 궁금하게 만들 것입니다.
죄 짓고는 못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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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살해하고 팔아넘긴 죄책을 갖고 살아 온 형들은 요셉에게서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죄값을 톡톡히 치루고 있습니다. 베냐민에게서 잔이 발각되어 다시 요셉 앞에 섰을 때 유다의 고백을 보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44:16)”. 죄인을 끝까지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 범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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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자각은 하지만 이들은 끝끝내 그들이 요셉을 팔았다는 진실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 말만 했어도 야곱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형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지 않습니다. 모르지요, 훗날 애굽으로 들어가서 옛날을 추억하며 야곱에게 용서를 빌었을지…. 그러나 성경은 침묵합니다. 아버지가 죽자 요셉이 복수할 까 봐 벌벌 떠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요셉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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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죄를 자백하면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유다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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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장부터는 열두 형제 중 장남인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의 지도력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실질적 장남의 역할을 합니다. 형제들의 안녕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과 행동을 합니다. 요셉을 죽이고 팔려고 하던 그 유다에서 자기 희생적 사람으로 상당한 변모를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창세기에서 유다는 별로 주목받을 만한 인물을 아닙니다. 메시아 그리스도가 유다의 계보에서 나왔다는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오히려 메시아가 요셉의 계보를 따라 나왔다면 더 극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유다-다윗- 솔로몬-스룹바벨-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밝혀 주는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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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에서 야곱이 유다에게 한 축복의 내용을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규 (왕권)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8, 10)”. 야곱이 성령의 감동으로 한 예언적 축복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창 3:15절의 약속이 유다의 후손을 통해 나오는 왕인 다윗 왕을 거쳐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복음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야곱을 탈탈 털어버리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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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한 가지 (베냐민) 마저 놓게 하십니다. 요셉을 놓게 하셨고 이젠 “굶어 죽으나 자식을 잃어 슬픔에 죽으나” 한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아서 결국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43:14) 는 고백을 이끌어 내십니다. 야곱의 인생이 참 험난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요셉이 살아 있고, 당대 세계 최강국의 총리의 자리에 앉아 있는 믿기 어려운 복된 소식을 가지고 계시나 야곱의 편에는 이 모든 것이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야곱의 편에서는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도 없을 만큼 슬픔만 가득한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지탱한 건 하나님의 약속 하나 뿐이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야곱 (이스라엘)의 기쁨은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과 동일한 “부활의 기쁨” 이었습니다. 성도의 삶이 딱 이런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난들은 우리편에서는 고생이고 고통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천국의 복은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영적으로 이 복을 지금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으며, 그것이 복된 소망이며 이 땅을 살게 하는 힘이 됨을 고백합니다.
창 45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를 밝히고 야곱을 모시고 오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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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5장은 용서의 진수를 보여 줍니다. 요셉의 입장에선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그가 가진 권력으로 전부 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도 형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근데 피해자인 요셉이 더 크게 더 많이 웁니다. 그의 평생의 고통이 시간과 용서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용서는 나의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할 때 할 수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5).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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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삶과 요셉의 신앙에서 나온 삶에 대한 해석은 우리에게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가야할지에 대한 신앙의 원리를 줍니다. 요셉은 자신의 고난과 영광을 하나님의 사명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였습다. 형들의 악행조차도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으로 알고 용서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요셉의 형들이 자기를 팔지 않았다면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이런 것입니다 (롬 8:28). 인간의 악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을 알게 됩니다.
45:7–8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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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신앙 고백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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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많은 자손 (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한 약속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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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한 사람을 보내시고 온 세상의 주와 통치자가 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구원하신 구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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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8절 & 46:30절에 참 눈물나는 감동의 순간입니다. 야곱의 마음에 이미 죽었던 아들을 다시 만난 건 야곱에겐 실제로 요셉이 부활해서 재회한 것입니다. 분명 재림시 부활의 기쁨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활시 사랑하는 남동생, 아버지를 야곱과 요셉처럼 다시 만나 목을 어긋맞춰 안고 한참을 기쁨으로 울것입니다.
창 46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과 요셉을 만난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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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절까지 야곱의 가나안 생활이 종결된다. 8절부터는 애굽 생활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손이 작동되는게 너무 잘 보인다. 기근을 일으켜 결국 70인의 히브리 사람들 애굽으로 들여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이후 최소 2백에서 4백만의 대민족이되어 애굽에 나와서 다시 이땅을 약속의 땅으로 취하기까지 이별이다. 인간의 관점에선 인간의 죄가 빚어내는 고통, 분노, 슬픔, 절망, 다툼, 속임, 음란등으로 점철된 역사지만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구속의 완성을 향해 한 스텝 한 스텝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인자하심(헤세드, steadyfast love, everlastig love) 을 본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이땅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또 아무리 좋아도 모든 것은 성도의 죽음과 예수님의 재림에서 결정난다.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 하루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강물처럼 영혼 깊숙한 곳에서 샘물처럼 흘러 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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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 하루도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창 47
야곱과 그의 가족이 바로와 대면하다: 요셉의 지혜로운 통치: 야곱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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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그의 가족이 바로를 대면하고 대화하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합니다. 온 땅에 기근이 더욱 심하자 요셉의 지혜로운 통치로 온 세상이 기근으로부터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유언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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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야곱이 ‘바로’ 를 축복하는 장면은 야곱에게 ‘복의 근원’ 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실현되는 그림자입니다. 복을 비는 자가 더 높은 법입니다. 온 인류의 복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 “그 씨” 이십니다.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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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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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지혜로운 통치가 돋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정의롭고 지혜로운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혜와 자비가 다함이 없는 애굽의 ‘주’ 와 통치자 요셉의 다스림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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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이 Key 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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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 총리가 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극심한 기근을 일으켜 야곱의 전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고센 땅에 정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70명의 이스라엘 족속이 이후 430년동안 60만 장정, 일인 가족 최소 4명만 잡아도 2백만, 유대인들이 자녀를 많이 낳는 걸 감안하다면 4백만도 족히 넘는 어마 무시한 큰 민족이 됩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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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애굽은 이스라엘의 “자궁”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10개월간 엄마의 자궁에서 잉태한 아이가 길러졌다가 출산하듯,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430년간 이스라엘을 양육하셨다가 출애굽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출산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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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속사는 교회사에서도 한 개인의 삶의 여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최후 구원을 향해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임을 잊지 말고 살아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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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마지막 유언은 자기가 죽거든 애굽 땅 (이곳이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도) 에 묻지 말고,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역시나 그의 험악한 세월을 붙잡고 버티고 견디며 소망하며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의 모든 인간적인 단점과 그의 실패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 카운트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그의 믿음’ 입니다. 또 그것이 성도인 우리들의 본이 되기도 하구요. 하지만 야곱의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전 인생을 통해 일으키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던 (창 15:6), 야곱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임을 믿습니다.
요셉에게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예표적(모형적) 모습 비교
요셉 | 그리스도 | |
고난의 삶 → 영광 (총리) | 십자가의 고난→ 부활의 영광 | |
통치자 (왕) | 왕 | |
하나님의 꿈 해석 (선지자) |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심,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 (선지자) | |
세상 위에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 | 지혜의 근원, 지혜 자체, 지혜의 보고 되심 | |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가족을 보존하고 구원하기 위해 보냄받은 자 |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예수) 보내심을 받음 | |
자기를 죽이려하고 팔아넘긴 형들 (대적자)을 용서함 |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자들과 죄인을 용서하심 |
창 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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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다 읽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에 있어 씨앗과 같은 단계입니다. 씨앗이 심겨져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찬란한 꽃과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알면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복음의 시작과 그 의미들을 더욱 풍성하게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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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라는 인물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른 점도 있지만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셉이라는 인물의 삶과 성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요셉은 무고하게 악한 자들로부터 고난 당하고 죽임 당하는 자리까지 갔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당시 열방의 실질적 통치자가 됩니다. 다윗이 그러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으신 분이 악한 자들에게 고난당하고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로 높이셨습니다.
창 48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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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장남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같은 듯 합니다. 제 부모님도 장남이 저에 대한 마음이 두 동생들보다 특별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두 다 사랑했고 똑같이 키웠지만, 장남에 대한 부모의 특심은 인간 부모들의 DNA 인것 같습니다 (제 사견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손을 바꿔가면서 차남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리 나이가 많아 영적으로 어두워 분별하지 못한채 에서인줄 알고 야곱에게 축복했던 자기 아버지 이삭과는 달았습니다. 나이 많아 병들었어도 그의 영적 분별력은 깨어 있었습니다. 분명이 에브라임이 차남이라는 걸 알고 성령의 감동 가운데 그의 미래를 내다보고 축복하였습니다 (19).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야곱의 예언적 축복대로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에브라임 족속이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북이스라엘 열지파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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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옆에 이런 묵상글을 남겨 두었네요. “나도 임종시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지금도 내 삶을 되돌아보면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호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 아버지이셨다. 하나님은 진정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분이시다!” 이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임을 믿습니다.
창 49
열두 아들들에게 남긴 야곱의 유언을 남기고 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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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유언은 선지자적 계시입니다. 유언이 모두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셉이 받을 축복에 집중하지만, 저는 유다에게 남긴 예언이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형광펜으로 8절부터 12절을 하이라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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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내용은 “왕과 왕권” 에 대한 것입니다. 원수의 목을 잡는다는 것은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킨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되고 (창 3:15 성취), 종말에 완전히 패배하여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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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말로 ‘찬송’은 ‘야다’ 인데, ‘유다’ 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찬송의 대상이며, 그가 행하신 일이 찬송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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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에서 야곱이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의 전 인생은 고난과 죄악들로 점철되었지만,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시고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그 약속을 마지막 호흡때까지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시키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창 50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한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요셉의 유언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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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죽자, 요셉을 두려워했던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요셉의 말과 행동과 삶은 이 부분에서도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0:19–20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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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고백은 그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였고, 이는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셨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사적 복수야 말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의 삶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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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은 그리스도의 전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시기로 인해 무고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사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예수 믿는 수 많은 자기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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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유언 역시 자신의 유골을 조상들의 땅에 매장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히 11:122). 요셉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영원한 본향을 소망했던 믿음의 선진이었습니다. 요셉의 해골은 나중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들어갈 때 유언대로 이루어집니다 (여호수아 24:32). 정말 그렇습니다. 정녕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롬 1:17) 가 맞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몇 장들은 야곱 족속이 어떻게 애굽에서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출애굽기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출애굽기를 읽어 나가겠지만, 들어갈 때 70인이었던 야곱 족속이 나올 때는 장정만 60만 (2백~4백만) 큰 민족이 되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스라엘을 잉태하는 책입니다. 애굽은 엄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다가 마침내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출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