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욥기서를 “고통에 대한 지침서” 로 읽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욥기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사역을 드러내고 가리키는 책입니다.
욥기에서 그리스도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욥기서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래 영상을 꼭 시청해 보세요. 욥기가 어떤 책인지, 어떻게 욥기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0분정도 소요되는 영상이니 놓치지 마시고 꼭 보시기 바랍니다.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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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지혜서입니다. 욥기 3~37장은 욥 자신의 고난을 토로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과 욥의 친구들의 변론의 내용입니다. 욥기의 핵심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38장에서 욥기의 핵심 메시지가 나옵니다.
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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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하나님 경외와 선함을 소개하고 (1-5), 이를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하십니다. 사탄답게 하나님께 욥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때문에 경외하는 것이라고 폄하합니다. 즉 욥의 경건한 신앙은 기복신앙이라는 것이죠!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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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경외함을 입증하기 위해 사탄에서 몸에 손대는 것 외에 모든 것을 허용 하신 후, 욥은 하루 아침에 모든 자녀들과 재산과 종들을 상실해 버립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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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기 뿐만 아니라 아들들까지도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범죄할 까봐 늘 제사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5). 하나님 앞에 거룩한 존재 되기 위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며 다루었는지를 보면서, 죄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록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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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21) 에 나오는 욥의 고백은,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성도가 고난을 이기는 태도일 것입니다.
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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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욥을 쳐서 일으킨 모든 고난에도 욥이 범죄하지 않자, 다시 하늘의 법정에서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변론이 일어납니다. 사탄은 욥의 온전함을 자랑하시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아서라고 하면서 그의 몸을 치면 욥도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 참소합니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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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허용으로 인해 욥은 처절하고 비참한 상태로 고통을 당하며 아내의 저주까지 받습니다 (7-10). 그 모습을 본 욥의 친구들 역시 망연자실하며 함께 그 고통에 주저 앉습니다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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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의 논쟁과 하나님의 허용, 사탄의 공격과 영문도 모르게 당하는 욥의 고난과 고통을 우리의 이해와 이성을 넘어서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불가해한 실재가 한편으로는 욥기서가 의도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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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욥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시적으로 저주합니다.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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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의 리워야단의 격동이란 사탄의 권세와 능력과 배후조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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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저주의 시를 듣다보면, 그의 고통의 크기가 전이되어 옴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고통의 크기 역시 욥의 것을 능가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의 나심을 저주하거나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성육신 하신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자원하여 당하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욥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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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 중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의 자기 생일의 저주의 말을 듣고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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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이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당연 법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욥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고 있습니다 (17). 그의 판단의 근거는 철저한 인과응보 권선징악에 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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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대답은 상처에 식초를 붓든, 욥의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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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고통의 문제 앞에서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판단하기를 유보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진 욥의 고난에 대한 변론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권신징악과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저주를 받는 세상의 모습이 비일비재합니다.
욥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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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책망에 대한 욥의 대답 부분입니다. 겪고 있는고통의 크기를 묘사하면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고,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인식합니다 (6:19, 2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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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엘리바스의 책망이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함을 표현합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6:25).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할 때 이런 태도를 견지할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하며 그들의 편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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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은 특히 까닭없이 죄없는 자신이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당하는 비참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며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의로움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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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장에서 욥의 대답은 무죄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철저한 죄인으로 형벌당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를 외치셨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게 합니다.
욥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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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첫번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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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인과응보). 하나님에 대한 말을 옳은 말이지만 적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진리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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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7절만큼 오용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소위 개업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들에 의해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구절로 사용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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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고난이 그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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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 역시 엘리바스와 같이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하나님을 내세우며 실상은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욥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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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책망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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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대답은 전반적으로 자신은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치셨다고 토로합니다. 죄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정죄한다고 여깁니다 (15-20). 이런 말은 의도치 않았지만,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은 분이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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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은 악이 성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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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답답함과 원통함은 천상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욥처럼 고통을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크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어렵기만 한가?” 라고 하나님께 탄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타인의 죄를 대신해 고난당하셨지만 욥과는 달리 삼위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자원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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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기도입니다. 욥은 자신이 범죄하지 않았고 의로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시고 벌하심에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럴지라도 욥 자신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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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1),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7),…내가 의로울지라도 (15). 17절에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부분은 욥의 친구들의 책망까지도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라고 불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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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욥의 불평의 토로와 고통의 호소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것을 알고 믿으며 (8-9),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심판도 믿습니다.
욥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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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첫번째 말입니다. 소발은 욥이 자신의 의롭다함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파함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그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죄가 있기에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옳은 듯 보이지만, 틀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교리적 지식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을 한번 더 죽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죄’를 얻기 위해 욥이 회개하면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 말합니다 (13-20).
욥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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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말에 대한 욥의 반격이 거세집니다. 1-6절은 하나님이 선한자에게 재앙을 내리고 악한 자.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를 형통하게 한다고 반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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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나타나지만, 욥은 창조 세계에 대한 풍성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을 깊게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12).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근본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섭리) 과 통치 사역에 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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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23, 24절은 이스라엘과 이방 국가들의 흥망 성쇠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 1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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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서 이어진 소발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1-19). 욥은 계속해서 자신의 무죄, 무고함을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려 합니다. 친구들의 기소를 부당한 것으로 반박하고 그들의 변론이 거짓이라고 질책합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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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너희들이 아는 것을 나도 다 안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고통은 그런 것들로는 해석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이런 뜻일겁니다. 4절은 “모르면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한다” 는 말과 비슷합니다. 15절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변론하기를 강하게 원합니다. 도리어 친구들이 하나님께 책망받을 것이라고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욥기의 마지막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 줍니다.
욥 13: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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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기도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침묵하시지 말고 말씀해 달라는 것입니다 (23). 사람이 아무런 이유없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이 통과하는 고통을 대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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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그분께 도리어 버림받은 것 같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시는 것 같은 생각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이 일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욥은 까닭없는 고난과 죽음을 방불하는 현재의 징계에 답을 찾지 못하며 하나님께 신원의 기도, 탄식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고난은 시편의 기자들 (다윗이 대표적) 의 고통에 대한 탄식시 속에 재현됩니다. 무죄한 의인의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며, 그리스도안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신앙으로 인한 고통의 패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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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버림받으심: 인간의 편에서 고통에 대한 답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에는 뜻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일하심을 신뢰할 뿐이다.
욥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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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먼저 인생의 덧 없음과 무상함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됨을 토로 합니다. 그런 후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 자기를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몰아 넣는 것을 단식하며 그 고통에서 풀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이러한 탄식 속에서 참 인간으로서 고난을 감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한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라고 기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욥의 고백을 통해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욥의 고통에 특성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욥이라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임을 보게 됩니다.
욥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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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의 말에 반박을 합니다. (두번째 사이클이 시작됩니다). 그는 이제 욥을 아예 대놓고 죄인 취급하고 악인 취급을 합니다. “욥 너만 지혜로운냐 니가 아는 것을 나도 알고 많은 지혜 자들이 알고 있다” 고 힐난합니다. 그러면서 악인을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욥에게 들이 갖다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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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나서 죽 하나님으로부터 악인이 당할 고통과 징계와, 심판에 내용을 말합니다. 이쯤되면 엘리바스는 욥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고통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죠. 우리 또한 엘리바스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얼마든지 사람을 정죄하고 그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결코 진리를 갖다 대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욥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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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기소에 대한 욥의 대답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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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의 욥의 말을 듣다보면, 확실히 지혜에 있어서 엘리바스는 욥보다 하수라는 걸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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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의 모든 고통의 궁극자를 하나님으로 확정하고 그의 고통을 더하게 하는 친구들까지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있습니다 (9-11).
욥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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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도 그의 고통으로 지쳐갑니다. 3-5절은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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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차라리 죽는 것입니다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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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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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야 이런 고백을 하게 될까요?
욥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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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사람 빌닷의 두 번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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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반박에 무척이나 열을 받았습니다. 이젠 대 놓고 욥을 악인 취급하며(5) 악인이 당할 저주들을 풀어 놓습니다. 악인 취급과 함께 불신자 취급까지 하며 말을 마칩니다 (21).
욥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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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두 번째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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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주셨는지에 대해 모르지만, 자신의 모든 고난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사모함 (26)을 가지며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할 ‘대속자’ (25)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욥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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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두 번째 말입니다. 욥의 말에 분통을 터뜨리며 악인이 하나님께 당할 일들을 구구절절이 나열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과 악인이 당할 결과들을 잘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술에는 두 가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악인에게 일어날 일들을 욥에게 잘못 적용한 것과 이 세상에서 악인이 그가 나열한대로 하나님께 반드시 징벌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욥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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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 틀렸음을 악인의 형통을 이야기 함으로써 반박합니다. 이 세상은 친구들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의인이 상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13절에서 악인의 형통에 대해, 14-15절에서는 악인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내용들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이땅에서 더 행복하고 그 자녀들까지도 복을 받고 심지어 죽을때 조차 고통없이 잘 죽는 자들이 악인이라는 것도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그렇죠. 온갖 권모와 술수, 거짓, 힘의 논리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악인들이 더 떵떵거리며 즐거운 생을 살아갑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 연약한 자들은 무너지 공의로 신음하고 탄식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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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6절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마치 전도서 기자처럼 제시합니다. 이땅에서 행복을 누리다가 죽은 자나 고통 가운데 죽은 자나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서 시체가 되고, 구더기가 들끊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무의미하고 허무한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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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에서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는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답입니다. 이땅에서 결판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에 최후 심판이 있다는 것이 큰 위로입니다.
욥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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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세 번째 사이클이 돕니다. 엘리바스→욥→ 빌닷→욥 → 소발의 순→ 욥의 사이클입니다. 욥을 정죄함이 반복됩니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5). 이젠 욥이 했던 일을 안 한 것으로 거짓 책망까지 합니다 (6-9). 예를 들면 욥이 과부와 고아를 돕지 않고 억압했다 합니다 (9). 게다가 욥이 하나님을 무시하기까지 한다고 기소합니다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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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 역시 욥에게 니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고통을 벗어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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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말은 좋은 말입니다. 욥의 고통과 연결시키지만 않는다면 도전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잘못된 적용입니다. 사랑없는 진리의 잣대를 들이댄 겁니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 Mr. Fix man 이 되려하면 안되겠습니다. 힘들어하는 지체들에게 더 많이 기도하고 말씀 더 많이 보고 매달리면 해결해 주실거야와 같은 조언은 도리어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저 곁에 있어주며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고통의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감춰져 있어 신비입니다.
욥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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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세번째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변론하기를 갈망하는 욥의 고통을 더 깊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기 원하나 하나님은 오히려 자신을 피해 숨어 다니시는 분으로 탄식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8-9).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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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세번째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변론하기를 갈망하는 욥의 고통을 더 깊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기 원하나 하나님은 오히려 자신을 피해 숨어 다니시는 분으로 탄식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8-9).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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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치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10). 욥은 사실상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용하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고통의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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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욥의 대답속에는 하나님 절대 주권, 작정의 신앙이 깊이 베여 있습니다 (13, 14).
욥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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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 (고아, 과부, 가난한 자)를 억압, 착취하는 악인들 (1-12);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13-17); 악한 자들이 당할 심판과 저주를 그림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8-20).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22-24)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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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말한대로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저주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욥의 말을 진리라고 선언합니다 (25).
욥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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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세 번째 말입니다. 역시 하나님에 대한 말은 다 맞지만 근데 틀렸습니다. 그의 진리의 표적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효과가 좋은 약이라도 환부에 정확하게 제대로 발라야만 낫습니다. 잘못된 부위에 바르면 도리어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욥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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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세 번째 사이클에서는 소발이 없습니다. 빌닷에서 끝이 납니다. 욥은 참으로 지혜자입니다. 온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막힌 시적 표현들도 묘사하며 그가 친구들보다 결코 덜 지혜롭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욥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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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욥의 세 친구들은 입을 다뭅니다. 욥의 세 친구에 대한 긴 말들이 31장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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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서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부당함에 대한 심경을 계속 드러냅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2). 전능자가 괴롭게하시는데 누가 당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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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욥이 세 친구의 말대로 한다면, 그간 욥이 주장했던 자신의 온전함과 의는 무너지기에 욥은 친구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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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로 보지 않으면 해석이 안되는 것이 많습니다 (27:2,5,6; 29:14). 죄없는 의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무고하게 고난당하는 것은 욥, 요셉, 시편기자들, 다윗왕에게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예표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고하게 박해를 당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신원 (vindicate) 하신 것처럼 종말에 그리스도로 인해 박해받고 피흘려 죽은 성도들의 원한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신원해 주심).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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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3절 부분은 악인의 멸망을 말하는 일종의 저주시입니다. 시편과 잠언의 주제와 일맥상통합니다.
욥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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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지혜와 명철 찬가입니다. 인간이 보석을 찾기 위해서 경탄할 정도로 지혜롭다. 돈되다는 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모든 인간 지혜를 다 동원해 땅끝까지 땅속까지 추적합니다 (1-11). 그러나 인간은 그런 보석을 찾게 하는 지혜와 명철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정작 그 지혜의 근원은 모릅니다. 지혜자 욥은 무지한 물질 추구적 인간에게 지혜의 은닉성 (12-14)과 지혜의 값(가치)의 무한함을 강조합니다 (15-19). 지혜와 명철의 근원을 반복적으로 물으며 그 해답을 하나님의 지혜에서 제시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가지는 방법(삶)에 대해서 (20-27),해결책을 28절에서 제시합니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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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에 대한 욥의 마지막 말입니다 (31장까지). 욥이 이전 하나님과 누렸던 ‘때’를 회고하며 그때로 돌아가기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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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 그로 인하여 복을 누리며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한 것은 욥의 의로운 다스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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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절의 내용을 보면 욥은 사회적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족장 (왕)(8, 9, 10,25) 과 제사장 (5)과 선지자 (21) 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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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하나님 나라의 원형인 에덴 동산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 담당했고 아브라함도 비슷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 의해 제사장직이 분리되었고, 사무엘에 의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이 분리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이 세가지 직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신학에서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하여,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며 소유된 백성으로서 왕,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세상 가운데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존재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욥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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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행복했던 날들을 회상한 이후 (29장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현실의 비참한 상태, 이전의 영광스럽고 찬란했던 상태에서 박탈되어 처함 현실로 인해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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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두고, 그 가운데 헛다리 짚고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이 고통을 배가시키고 있음을 말합니다. 욥을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은 이유없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에 주께서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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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잘못이해했듯이, 욥 또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제1원인은 하나님이시지만 (악을 허용하신 점에서) 실질적인 고통을 준 자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의 악을 허용하신 이유는 욥의 온전함, 경건함과 의로움을 자랑하고 또 증명해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지금 이 의로움의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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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아직 시험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탄식하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절규할 뿐입니다.
욥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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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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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위로임과 동시에 큰 두려움입니다. 고난 중에 큰 위로이며 죄악중에 큰 두려움이죠.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내 인생길을 살피시고 돌보시며 나의 가는 곳마다 그 걸음을 세실정도로 친밀하게 가까이 간섭하심이 참으로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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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전체에서 욥은 자신의 온전하고 의로운 삶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 해가 미치고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확고히 말합니다. 그의 삶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정직함 (5), 마음까지도 정직했고 (6-8), 결혼에서 성적 순결 (9-12), 상전과 주종의 관계에서 종의 인권을 존중함 (13-15),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구제함 (참된 경건( (16-23), 물질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김 (24-28), 원수 사랑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른 것) (29-30), 나그네를 대접함 (32),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삶 (33-34)을 진술하고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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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이 모든 삶의 동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위엄때문 이었습니다 (23).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함과 하나님의 위대하고 크신 엄위와 존귀하심,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죄를 짓지 않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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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0에서 세 친구에 대한 욥의 모든 말이 그칩니다.
욥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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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부터 37장까지는 엘리후가 욥을 공격하는 부분이고, 38장에서 41장까지는 하나님의 대답, 42:1-6절은 욥의 회개, 그리고 42:7-10절이 에필로그로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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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등장으로 다시 욥과의 논쟁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세 친구들이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다뭅니다.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이 어린 엘리후가 일종의 구원투수로 등판합니다. 그는 매우 자신 있어 보입니다. 욥의 자기 의 주장을 무너뜨리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들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내포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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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리는 하나님으 진리입니다. 신자들만이 진리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일반 은총 가운데 하나님은 진리를 계시하고 사람들은 이를 발견하고 알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학문이 가능하며 과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욥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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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욥을 공격하는 말을 합니다. 1-12절은 욥이 스스로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을 되풀이하며 비아냥 거리는 부분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지혜를 한껏 뽐냅니다. 아는 것도 많습니다. 교만하게도 자기가 욥의 의로움을 판단하겠고, 자신의 지혜로 욥을 가르치겠다고까지 합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몹시 교만한 자이든지, 실제로 많은 것을 아는 지혜를 가진 자일 수 있습니다.
욥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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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을 보면, 스스로를 지혜가 탁월한 자로 여김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과 지식 있는 자들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라 명령합니다 (2). 3-9절은 욥이 하나님을 향해 욥을 부당하게 정죄하고 형벌하신 분으로 비방했다고 몰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변호합니다 (10-15). 그의 말 속에 새겨 들어야 할 진리가 터져나오는 걸 보면 엘리후가 대단하긴 합니다.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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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는 그의 뛰어난 지식과 지혜로 이전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욥을 한번 더 죽입니다. 욥의 고통에 식초를 붓습니다. 그의 신학은 정통하지만, 적용을 잘못하였습니다. 욥을 악인 취급하고 하나님을 변호하면서 욥에게 네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36절에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참 나쁩니다. 어찌 이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가!
욥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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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가 욥을 정죄하기 위해 내 세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놀랄정도로 정확합니다. 그러나 그는 욥이 자기 의해 대한 신원을 끊임없이 ‘악’ 으로 단죄합니다. 그는 욥을 오해하였고 어찌보면 ‘거짓 증언’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신성모독죄를 덮어 씌워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와 유사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시키면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고, 자기들 스스로를 의롭다 여겼을 것입니다.
욥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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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의 엘리후의 말을 듣다보면, 속으로 “니 잘났다!”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악인과 의인이 각각 하나님께 받을 벌과 복에 대해 기술하지만, 여전히 인과응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욥 사이의 관계를 배제시켜 버립니다. 욥을 악인, 마음이 경건하지 않은 자(13) 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엘리후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교만하고 다른 이를 정죄하며 깊은 살처를 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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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은 욥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엘리후의 이해와 해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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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3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자연을 다스리는 자로 묘사합니다. 이것을 ‘자연 신학 (natural theology)’ 라고 합니다. 엘리후의 신학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인격에 깊이 관여하여 관계하시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시종 일관 하나님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 절대 타자(other) 인 듯 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언약관계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온전케하며 찬양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욥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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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의 자연신학, 창조신학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아멘’이 터져 나올 정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에 대한 통치와 운행을 시적으로 통찰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욥은 이미 그 이상으로 표현한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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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에서 그는 전능자를 찾을 수 없으며 그의 크심과 공의로 인해 인간은 단지 그를 경외하기만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정통 신학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 비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이건 기독교적 신론이 아닙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이를 “신정통주의”라고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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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들 & 엘리후와 욥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정당함을 끝까지 주장하며 하나님을 마치 자기 재판정에 세우고 싶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 관계 속에서 신앙했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들은 비인격적 관계 속에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도 나를 위해 그분이 죽으셨고 부활하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비회심자입니다.
욥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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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드디어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이 지금까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무한한 격차입니다. 전능하시며 전지하신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으로 자연과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다스리시며 보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것은 무릎꿇고 머리숙여 경배할 것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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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라고 하시며 그동안 욥이 했던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에 대한 답을 하십니다. 물론 세 친구들과 엘리후 역시 여기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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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과 39장을 읽어가는 내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시적인 아름다운 묘사들에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문학, 동물학, 지구과학 백과사전을 시집으로 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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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서 이 모든 말씀을 직접 들었던 욥은 분명 하나님 앞에 한 없이 낮아지고 작아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가졌던 모든 마음의 고통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분의 높으심과 위대하심 앞에 압도당해 경배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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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이 두장에 걸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크심과 나의 작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더 큰 경외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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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1:6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인 (하나님의 왕궁의 신하들처럼)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킵니다.